{"title":"Customs of New Year’s Eve in Joseon and their Falsity Found in Poetry of New Year’s Eve : Focusing on ‘Suse(守歲)’ and ‘Selling a fool[賣癡獃]’","authors":"Hwang-Jin Lee","doi":"10.33253/gohan.2023.40.145","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145","url":null,"abstract":"본고는 조선시대의 세시기와 세속기속시 그리고 제석시를 대상으로 조선시대의 제석 풍속 을 살펴보며 중국에서 유래한 풍속임이 인정되지만 우리의 풍속으로 온전히 토착화된 ‘수세’ 와 우리의 풍속으로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바보팔기’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제석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며 반성적 성찰과 새해를 맞이 하는 다짐 등의 내용을 소재로 한 시로 자연스레 제석의 여러 풍속이 언급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제석시는 고려시대 이규보부터 조선말까지 약 700년 동안 꾸준히 창작되어 왔기에 18세기 이후 왕성하게 창작되기 시작한 세시기나 세시기속시에 기록되지 않은 풍속을 보완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므로 제석의 풍속을 연구하는데 충분히 그 보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2장에서는 조선시대의 제석 풍속을 개괄하였으며, 3장에서는 중국에서 기원한 제석 풍속이지만 우리식의 풍속으로 토착화된 ‘수세’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도교의 ‘수경신’ 과 관련지어 수세를 하는 이유를 해명하는 것과 제석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우리만의 풍속은 수세가 비록 중국에서 유래하고 기원한 풍속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 의 것으로 토착화되며 우리의 풍속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세시기와 세시기속시에서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제석시’에는 종종 등장 하는 제속 풍속인 ‘바보팔기[賣癡獃]’를 제석시 속 제속 풍속의 ‘허’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바보팔기’는 송나라 오 지역의 제석 풍속을 읊은 범성대의 <매치애사>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바보팔기’는 문인들에게는 시의 주제나 제재로 사용되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풍속이기는 하나 정작 민중들은 이를 세시 풍속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 했기 때문에 끝내 우리의 제석 풍속으로 온전하게 정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1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905","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Changes in Gwamun(科文) during King Sukjong’s reign and the perspective of Bureaucratic Men of Letters","authors":"Seon-yi Park","doi":"10.33253/gohan.2023.40.265","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265","url":null,"abstract":"본고에서는 숙종대 科文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 科文에서 논란과 쟁점이 되었던 주요 사례를 고찰하였다. 숙종대 科文의 문체와 관련한 논란은 적지 않지만, 당대 科文 및 科文의 문체와 관련한 주요 논란과 쟁점은 크게 科文의 체제와 격식·科文의 용어 사용 ·科文의 표절에 관한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 숙종대 이전에도 科文의 체제와 격식을 지키지 않은 試券이 科場에서 제출되고 합격 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논란이 되었으나 명확한 규범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숙종대에도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었다. 다만, 숙종대에는 이전과 달리 科文의 체제와 격식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여 科文의 체제와 격식을 지키지 않은 試券이 합격한 경우 해당 試券을 제출한 응시자를 削科하고 試官을 파직하는 등 강경한 처분을 내렸다. 다음으로 숙종 이전 시기에도 科文에서 『老子』· 『莊子』·佛經 등 성리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異端書의 용어를 사용하여 논란이 되었다. 특히 숙종대에는 科文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관한 금기사항을 점차 확대하여 語錄과 稗官小品을 비롯한 붕당과 관련되는 직접적인 용어의 사용을 금지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조항을 『科擧事目』에 명시하여 규제하였다. 마지막으로 숙종대에는 親臨試의 잦은 시행으로 科表의 출제 비중이 높아지자 科表의 표절과 관련한 문제가 빈번하게 대두되었다. 당시에는 표절을 통해 科表를 손쉽게 작성 하는 행태가 만연하였으며 실제 科場에서도 표절한 科表가 합격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조정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하였지만, 결국에는 영조대에 이르러서도 科文 표절과 관련한 문제와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2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35","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The proofreading, translation, and commentary of Miscellaneous words and trifles (謏聞𤨏錄) 1","authors":"Deuk-yong An","doi":"10.33253/gohan.2023.40.435","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435","url":null,"abstract":"본고는 1525년 曺伸(1454-1528 혹은 1529. 字 叔度, 號 適菴)이 지은 『謏聞𤨏錄』에 대한 校勘·譯註이다. 교감과 역주의 臺本으로 삼은 판본은 다음의 다섯 종류이다. 우선, ① 李佑成 編 『謏聞𤨏錄』(이하 서벽외사본), ② 일본 동양문고 소장본 『謏聞𤨏錄』(이하 동양문고본) 등이다. 다음으로, ③ 金鑢가 엮고 주석한 『寒皐觀外史』(이하 한고관외사본), 1821년에 ④ 沈魯崇이 엮은 『靜嘉堂本 大東稗林』(이하 대동패림본), 1821년 이후 편찬된 ⑤ 『稗林』(이하 패림본) 등에 각각 수록된 『謏聞瑣錄』이다. 『소문쇄록』의 판본은 ①②와 ③④⑤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전자의 계열(서벽외사본 계열)이 현재 유포되고 있는 판본 중 가장 原本에 가깝다. 본고는 ‘서벽외사본 계열’로는 上卷의 절반, 후자인 ‘한고관외사 계열’로는 1권에 해당하는, 총 77則(한고관외사본 계열 기준. 서벽외사본 계열 기준으로는 총 75칙)의 기사에 대한 교감과 역주이다. 다만 현전하는 『한고관외사에는 ‘대동패림본’과 ‘패림본’의 소문쇄록 1권에 해당하는 부분이 落卷이므로, 본 교감·역주 1에 한하여 ‘한고관외사본’을 제외하고 ①②/④⑤를 대본으로 삼아 교감·역주하였다. 그 결과 구성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筆記는 ‘사건이나 史實, 인물의 言行, 세상 만물’ 중 어떤 대상에 무게를 두었느냐에 따라 개별 단락의 성격을 ‘記事/記人/記物’로 나눌 수 있다. 본 교감·역주 1의 경우 각 범주에 해당하는 단락의 수는 한고관외사 계열 기준으로 ‘記事(36칙)/記人(19칙)/記物(22칙)’이었다. 다음으로, 서술 양상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의 전개와 중첩’을 敍事로, ‘논의나 고증에 무게를 둔 서술’을 敎述로 나누어 보았다. 그 결과 본고는 ‘敍事(35칙) / 敎述(42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詩를 ‘본격적 비평과 고증의 대상’으로 다루거나 ‘서사를 진행하는 계기’로 삼은 서술, 즉 詩話가 총 25칙이었다. 이미 『소문쇄록』이 完譯·公刊되어 있어 번역에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기존 번역서와 번역에 대한 생각이 늘 같지만은 않았다. 아울러 정확한 번역을 위해서는 교감이, 분명한 내용 이해를 위해서는 주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본 교감과 역주는, 적어도 정확한 번역과 분명한 이해로 가는 참조 준거의 의미는 있으리라 생각한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17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3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On Authorship of the Manuscript Copy of the Hangul Translation of Ibaekchileon","authors":"Jihao Han, Jin Hur Kyoung","doi":"10.33253/gohan.2023.40.007","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007","url":null,"abstract":"『훈민정음』 이 반포된 뒤에 다양한 고전의 언해본이 간행되면서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 杜甫의 시집이 왕명에 의해 25권 17책으로 언해 간행되었다. 그러나 李白 시 언해는 간행된 기록이 없었다. 홍윤표 교수가 1978년 전주의 한 고문헌 수집상에게서 우연히 구입하여 소장하였던 필사본 『李白七言』 은 ‘李白七言’ ‘遺響’ ‘李白古風’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백의 시 76수를 포함하여 총 148수가 한글로 번역되고 주석까지 실려 있다. 필사본으로만 전해 진 것을 보면 왕명에 의해 언해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언해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고문헌을 검색한 결과, 鰲川 韓伯愈(1675-1742)의 연보에서 56세에 『唐音』 을 언해하고, 57세에 『李白七言』 을 언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출생지인 泰仁 古縣 內는 전주의 고문헌 수집상이 필사본 『이백칠언』 을 처음 구입한 井邑 지역이며, 그는 『韻解 訓民正音』 을 지은 문자학자 申景濬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가 신경준에게 가르친 내용이 이 언해본에 그대로 실려 있으므로, 한백유가 『李白七言』 언해의 저자라는 사실이 확인된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3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Sangwudang Heo Jong’s Life and Poetry World","authors":"Hyok-myong Kwon","doi":"10.33253/gohan.2023.40.063","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063","url":null,"abstract":"본고는 상우당 허종의 삶과 시세계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2장에서는 허종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허종의 생애에서 주목되는 것은 허종이 문과에 급제하여 문 관으로서 환로생활을 시작했지만, 허종의 대범한 성품과 활쏘기 및 말타기에 능한 武才 를 알아본 세조에 의해서 무관직을 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허종은 문무겸전 의 능력으로 ‘出入將相’의 삶을 살게 되었다. 3장에서는 허종의 관료적 시세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허종의 시세계는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집약된다. 첫째, ‘將相’에의 抱負와 臣節의 태도이다. 허종은 무관직을 통해 功名을 세우고 중앙으로 돌아와 宰相이 되어 군주를 보필하여 국정을 다스리는 將相에의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포부는 한나라 班超에 자신을 빗댄 것이나 梅實을 기다려 국의 간을 맞추고자 하는 調羹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將相’에의 포부는 결국 군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허종은 신하로서 君恩에 보답하고자 하는 臣節의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는 호방한 시풍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둘째, 武官職 遂行의 어려움과 憂愁의 情緖이다. 허종은 무관직이 功名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면서도 자주, 오래도록 무관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는 물리적인 어려움이나 근심을 우수의 정서로 표출하였다. 이는 公的인 자아와 私的인 자아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 움, 인생의 무상함, 떠도는 신세의 한탄, 공명추구에 대한 후회 등으로 시화되고 있었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5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3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A Study on the Description Method of Tobacco-based False biographies in the Late Joseon Period","authors":"young-gun Kim","doi":"10.33253/gohan.2023.40.297","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297","url":null,"abstract":"이 논문은 조선 후기 담배 소재 가전의 서술 방식을 조명하기 위해 담배 소재 가전의 구도와 설정 및 전고 활용 양상을 서술하여, 담배 소재 가전이 기존 가전에서 가지는 특징과 의의를 고찰한 글이다. 담배 소재 가전은 작품마다 구도와 설정에서 주인공의 선계와 특징을 서술할 때 전고를 활용하기보다는 담배의 이명의 한자와 담배의 특성을 이용하여 서술하였다. 또 그 설정 가운데 주인공의 활동 시기가 실제 조선에 담배가 유입되어 유행했던 시기가 비슷하였는데, 작품 내용에서도 조선에서 실제 행해졌던 담배의 사적과 문화가 나타난 다. 이는 전고의 부재로 인해 담배의 이명의 한자를 이용하고 실제 조선에서 행해졌던 담배 문화를 서술한 것이다. 담배 소재 가전에서도 기존 가전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는 전고가 활용되는데, 그 양상이 기존 가전에서 활용했던 전고 양상과 다르다. 기존 가전에서 직접적으로 해당 사물과 관련된 전고를 활용했지만, 담배 소재 가전에서는 담배의 이명의 한자·속성·사 적 등 간접적인 전고를 활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담 배와 직접 연관된 전고가 많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담배에 대한 전고가 문인들 사 이에서 공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전고를 활용하면 독자들의 재미와 공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담배 소재 가전에서는 실제 행해졌던 사적과 문화를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담배와 관련된 간접적인 전고를 활용하여 전고의 부재를 해결했다. 이 때문에 전고의 범위가 기존 가전보다 넓고 전고의 활용이 비교적 자유로워 기존 가전에 비해 폭 넓은 서술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 담배가 17세기 초 조선에 유입된 이후로 18세기까지 5편 이나 되는 담배 소재 가전이 등장한 것을 통해 당시 문인들이 담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2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4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Study On Authorship Estimation and Feature of YuGwanDongRok (遊關東錄) :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with the MyeongAmJip (明庵集) and GwanDongRok (關東錄)","authors":"Se-Yeon Kim","doi":"10.33253/gohan.2023.40.199","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199","url":null,"abstract":"이 논문은 『明庵集』 <關東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遊關東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소장[A172228])의 작자와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관동록』 은 1727년 1월 20일부터 약 5개월 간 금강산을 유람한 1책의 필사본이다. 본 논문에서는 작품 내 정보를 근거로 『유관동록』 의 저자가 明庵 鄭栻(1683~1746)인 것을 확인하였다. 鄭栻은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과거를 포기하고 은둔하며 지낸 인물 이다. 정식은 1727년 진주에서 출발하여 경상도를 거쳐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그의 또다른 금강산 유기 <관동록>에서 언급한 『관동일록이 바로 『유관동록』 이다. 『유관동록』 특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자신이 드러내고자하는 금강산의 가치 판단을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서 대신 전달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정식은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 뒤에 다른 사람의 표현을 통해 정식 자신이 느끼는 감상을 독자도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둘째, 와유를 위한 사적 기록을 다수 수록하였다. 정식은 선행자의 문학 작품이나 사적을 다수 인용하였는데, 이를 통해 와유록을 만들고자 했던 정식의 노력과 당시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도서를 확인할 수 있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3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3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The nature of interest in subalterns in Oh-hoo-kang-jeon","authors":"Haein Yoo","doi":"10.33253/gohan.2023.40.397","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397","url":null,"abstract":"이 글은 <오후강전>에 나타난 하위주체에 대한 관심의 성격을 규명한 논의다. 이를 위해 먼저 관심의 양상을 살폈다. <오후강전>은 하위주체를 결연의 주역으로 설정함 으로써 인물이 겪는 갈등의 양상이 상층여성이 결연의 주역으로 등장했던 기존의 애정 서사와 차이를 보였다. 첫째, 여성이 겪는 성적 수탈의 위협이 남녀 주인공의 열정적인 애정을 드러내기 위한 서사적 장치가 아닌 실질적인 위협으로서 형상화되어 있었다. 둘째, 강한 이념적 지향성을 지닌 여성이 겪는 심리적 갈등이 사실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이는 모두 <오후강전>이 결연의 주역으로 내세운 인물이 상층여성에 비해 서사화의 제약이 강하지 않았던 하위주체였기 때문에 재현될 수 있었던 여성 수난의 일면들이었다. 다음으로는 하위주체 오후강의 소설적 형상과 현실 반영성이 높은 야담에 등장하는 하위 주체의 형상을 비교하여 <오후강전>에 나타난 하위주체에 대한 관심의 성격을 파악하고자 했다. <오후강전>은 과부 오후강의 개가 서사가 이야기의 중심축이기에 동시기 향유된 『청구야담』 소재 과부담 및 개가담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야담에서 과부의 개가는 성적 욕망의 해소나 성적 수탈의 위협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 선택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오후강전>의 경우, 오후강이 하위주체로서 겪는 현실적 문제보다는 오후강과의 결연 을 욕망하는 김해갑의 애정 문제가 강조되며 결연의 대상으로 그 형상이 굴절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첩이라는 오후강의 신분적 지위를 중심으로 살폈을 때 더욱 두드러졌다. 첩은 상층여성과 달리 성적 개방성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오후강은 강한 이념 성을 지닌 인물로, 실제 첩의 면모와는 거리를 지닌 굴절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보았을 때, <오후강전>에서 하위주체에게 보인 관심은 하위주체라는 실체적 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이에 <오후강전>이 하위 주체에 대한 관심을 서사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분석해 관심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 결과 <오후강전>에 나타난 하위주체에 대한 관심은 상층여성을 대상으로 한 결연 서사가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웠던 19세기의 서사 환경에 의해 촉발되었고, 재현된 고난의 일면들은 하위주체가 결연 대상으로 설정되었을 때 서사의 흥미를 추동하기 위해 설정된 장치들에 의해 수반된 부수적 효과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강전>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애정 서사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작품으로, 하위주체 오후강의 이야기가 아닌 하위주체와 결연하고자 했던 상층 남성 김해갑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오후강전>에 재현된 하위주체 오후강의 고난은 김해갑의 욕망 추구 서사에 한시적으로 소 비되고 만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지녔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106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90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Characterization Method and its Meaning in Guuisajeon (九義士傳)","authors":"Yomoon Yoo","doi":"10.33253/gohan.2023.40.367","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367","url":null,"abstract":"이 글은 조선후기 김평묵의 <구의사전>을 통해 당시 명 유민을 그려내는 방식과 그 효과 및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탐구하는 데 목적을 둔다. 구의사는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함께 조선으로 내려온 9명의 명 유민을 일컫는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구의사전>을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의 전개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간의 연구가 화서학파의 표피적 이미지만을 가져와 해석한 결과물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이 글은 <구의사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김평묵과 당시 화서학파 의 맥락과 아울러 ‘전(傳)’ 내부의 미시적인 서술기법을 파악해 보았다. 구의사에 대한 기록은 몹시 방대하지만, 성해응의 황명유민전에서는 존주론을 위 해, 왕덕구의 황조유민록에서는 일민 의식을 지향하는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며, 특히 왕덕구는 주변 인물인 효종의 회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구의사의 일민 의식을 강조 하는 전략을 취했다. 김평묵의 <구의사전>에는 이전 기록들과 다르게 북벌론을 주도하 는 효종의 모습이나 노론과 남인에 대한 서사가 개입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된 까닭은 노론의 정통이 화서학파임을 알리는 동시에, 매산 학파의 이단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수외양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효종과 척화신들을 활용함으로써 척사론의 담론을 주도하는 화서학파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다시 말해 <구의사전>은 김평묵이 살던 19세기 말 조선 사회를 환유한다는 점인데, 효종의 적극성은 당시 군주(고종)의 내수외양에 대한 강조를, 척화신의 영웅성은 화서학파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시 정 치적 생존 노선과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김평묵의 의도가 내재해 있다. 결론적 으로 <구의사전>은 단순한 이념적 테스트가 아닌 정치적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90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A Study on Jisan An Hyo-jin’s Reality Perceptions in Hwahaengilgi","authors":"Ji-hyeon Song","doi":"10.33253/gohan.2023.40.229","DOIUrl":"https://doi.org/10.33253/gohan.2023.40.229","url":null,"abstract":"우리나라는 20세기에 들어서며 일제의 통치와 서구 문물의 유입 등 국내외적으로 급 격한 변화를 겪었다. 유교의 위상도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자 유학을 고수했던 당시 유림들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판단하고,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에 골몰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남 지역의 유림들은 우리나라에 유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을 대안 으로 삼아 안향의 공적을 기리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면서 ‘공자-주자-안향’의 순으 로 도의 대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도통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공자와 주자, 안향의 연보를 통합한 『삼성현편년연보』를 간행하고 안향의 신도비를 새롭게 세우면서 서문과 비문이 필요했다. 이를 공자의 후손에게서 받아오자는 의견이 모이게 되고, 그 결과 안 향의 후손인 지산 안효진이 곡부를 다녀오는 임무를 맡았다. 안효진은 기차를 타고 이동하여 곡부에 가서 공묘와 공림 등을 둘러보고, 공자의 후손 으로부터 『삼성현편년연보』의 서문과 안향의 신도비 비문을 받아 귀국하였다. 곡부를 다녀온 여정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이 『화행일기』이다. 공자의 유적지 관람, 공자 후손들과의 교류, 기차를 타고 오가는 여정, 곳곳에서 느낀 바를 읊은 시문 등 다양한 양상이 『화행일기』에 담겨 있다. 그 과정에서 안효진은 곡부에서 공교회의 공교운동을 보고, 도통사의 활동과 맥락이 부합하며 그 정신이 상통한다고 여겼다. 그는 공교회의 총리를 맡고 있던 공상림의 제안 을 받아 도통사에 공교회 지회를 설립하는 데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안효진을 비롯한 도통사의 유림들이 공자의 후손에게 문장을 요청하고 공교운동에 관 심을 갖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유도의 몰락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효진은 깊은 우려와 탄식을 드러내면서도 극복하려는 의지와 미래에 대한 기대 감을 내비쳤다. 도통사를 창건하여 공자를 비롯한 주자와 안향을 추숭하는 활동에 대해 강조하며, 그렇게 해야만 도를 부지하고 기강을 바로잡아 우리나라가 다시 제대로 일어 설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안효진은 안향의 후손으로서 공자 후손과의 교류에 앞장선 유림이었다. 63세 노인의 몸으로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유교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사명감과 결연 한 의지로 버텨낸 인물이다. 안효진과 도통사 유림이 펼친 다양한 활동들은 유도를 부지 하여 우리나라를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유교부흥운동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1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603543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