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Characterization Method and its Meaning in Guuisajeon (九義士傳)","authors":"Yomoon Yoo","doi":"10.33253/gohan.2023.40.367","DOIUrl":null,"url":null,"abstract":"이 글은 조선후기 김평묵의 <구의사전>을 통해 당시 명 유민을 그려내는 방식과 그 효과 및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탐구하는 데 목적을 둔다. 구의사는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함께 조선으로 내려온 9명의 명 유민을 일컫는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구의사전>을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의 전개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간의 연구가 화서학파의 표피적 이미지만을 가져와 해석한 결과물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이 글은 <구의사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김평묵과 당시 화서학파 의 맥락과 아울러 ‘전(傳)’ 내부의 미시적인 서술기법을 파악해 보았다. 구의사에 대한 기록은 몹시 방대하지만, 성해응의 황명유민전에서는 존주론을 위 해, 왕덕구의 황조유민록에서는 일민 의식을 지향하는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며, 특히 왕덕구는 주변 인물인 효종의 회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구의사의 일민 의식을 강조 하는 전략을 취했다. 김평묵의 <구의사전>에는 이전 기록들과 다르게 북벌론을 주도하 는 효종의 모습이나 노론과 남인에 대한 서사가 개입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된 까닭은 노론의 정통이 화서학파임을 알리는 동시에, 매산 학파의 이단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수외양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효종과 척화신들을 활용함으로써 척사론의 담론을 주도하는 화서학파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다시 말해 <구의사전>은 김평묵이 살던 19세기 말 조선 사회를 환유한다는 점인데, 효종의 적극성은 당시 군주(고종)의 내수외양에 대한 강조를, 척화신의 영웅성은 화서학파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시 정 치적 생존 노선과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김평묵의 의도가 내재해 있다. 결론적 으로 <구의사전>은 단순한 이념적 테스트가 아닌 정치적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5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Go'jeon gwa haeseog","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33253/gohan.2023.40.367","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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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글은 조선후기 김평묵의 <구의사전>을 통해 당시 명 유민을 그려내는 방식과 그 효과 및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탐구하는 데 목적을 둔다. 구의사는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함께 조선으로 내려온 9명의 명 유민을 일컫는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구의사전>을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론의 전개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간의 연구가 화서학파의 표피적 이미지만을 가져와 해석한 결과물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이 글은 <구의사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김평묵과 당시 화서학파 의 맥락과 아울러 ‘전(傳)’ 내부의 미시적인 서술기법을 파악해 보았다. 구의사에 대한 기록은 몹시 방대하지만, 성해응의 황명유민전에서는 존주론을 위 해, 왕덕구의 황조유민록에서는 일민 의식을 지향하는 면모가 강하게 드러나며, 특히 왕덕구는 주변 인물인 효종의 회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구의사의 일민 의식을 강조 하는 전략을 취했다. 김평묵의 <구의사전>에는 이전 기록들과 다르게 북벌론을 주도하 는 효종의 모습이나 노론과 남인에 대한 서사가 개입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을 띠게 된 까닭은 노론의 정통이 화서학파임을 알리는 동시에, 매산 학파의 이단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수외양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효종과 척화신들을 활용함으로써 척사론의 담론을 주도하는 화서학파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다시 말해 <구의사전>은 김평묵이 살던 19세기 말 조선 사회를 환유한다는 점인데, 효종의 적극성은 당시 군주(고종)의 내수외양에 대한 강조를, 척화신의 영웅성은 화서학파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시 정 치적 생존 노선과 정치적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김평묵의 의도가 내재해 있다. 결론적 으로 <구의사전>은 단순한 이념적 테스트가 아닌 정치적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