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The Peace Negotiation and the Yu Seong-ryong's Diplomatic Polic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1593.4-1595.7)","authors":"Hanshin Kim","doi":"10.17948/KCS.2017..77.213","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213","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2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351283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서병오 제화시(題畵詩) 연구 -자신의 그림에 쓴 창작시를 중심으로-","authors":"이인숙","doi":"10.17948/kcs.2017..77.67","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67","url":null,"abstract":"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는 시, 서예, 그림에 모두 능했던 삼절(三絶)의 서화가이다. 한 사람이 세 가지 예술을 다 잘한 시서화 삼절에 대한 담론은 예술 재능의 겸비나 시서화일률(詩書畵一律)이라는 문인 예술론의 측면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삼절의 재능이 한 화면 위에 구현된 구체적 작품에 대한 주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의 내용과 그릴 당시의 상황에 부합하는 제화시(題畵詩)를 지어 그붓으로 바로 그림 위에 화제(畵題)로 써 넣은 그림은 시인이자 서예가, 화가인 삼절 예술가의 대단한 권능이 발휘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시를 활용하는 대신 제화시를 화가 자신이 창작해 써넣는 것이 이러한 작품의 관건이 된다. \u0000근대기 문인화가인 서병오의 그림에서 제화시를 창작해 화제로 쓴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병오의 그림 300여 점을 조사하여 제화시를 확인해 본 결과 그가 제화시를 창작한 그림은 15점에 불과했다. 서병오가 상당히 많은 시, 서예, 그림을 남겼음에도 제화시를 창작한 그림이 매우 적다는 사실은 그만큼 특별한 경우에만 제화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제화시를 창작한 그림은 평소의 일반적 관례를 깰 만한 특정한 계기와 즉흥시 창작력이 만나 이루어진 작품인 것이다. 창작 제화시가 있는 그림에 대한 이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 질 수 있겠으나 이 연구는 이러한 희소성에 주목하여 제화시의 창작 계기를 중심으로 분류하여 이해해 본 것이다. \u0000서병오의 제화시 창작 계기는 네 부류로 나누어진다. 서병오는 과거를 보아 진사에 급제한 유학 지식인 출신이다. 시서화를 즐기며 자적(自適)하는 문인의 심정이 나타나 있기도 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만남을 기념하는 교유의 산물로 제작되기도 했다. 기생 관련 창작 제화시 그림은 각별한 기념물로서 시서화를 이해하는 기생이 많이 활동한 식민지 근대기의 상황과 풍류를 좋아한 그의 기질이 결합되어 나타났다. 근대기는 일본인들의 영향으로 서화의 상품화가 크게 촉진된 시기이다. 서병오의 창작 제화시그림은 서화 애호층이 두터웠던 대구에서 차별적 상품이라는 경제적 효용을 위해서도 제작되었다. \u0000서병오가 제화시를 창작한 그림은 화가이자 서예가이며, 시인인 그의 역량이 한 화폭에 결합된 독특한 작품으로 그의 문인 서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나타나 있기도 하고, 그가 만났던 남녀 인물들과 교유의 산물이기도 하며, 차별적 가치를 가진 상품이기도 하다는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서병오의 창작 제화시 그림은 자작시까지 지어 그림 위에 써 넣음으로서 그림을 그린 뜻을 더욱 의미 깊게 할 만 한 매우 사적인 특정한 계기를 잘 활용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작품으로서 서병오의 창작 제화시 그림은 서병오 고유의 예술적 개성을 통해 시와 그림이 의미와 이미지로 서로 호응하고, 그림과 글씨가 같은 필성(筆性)으로 어울리며 시서화가 융합한 화면을 통해 각별한 예술적 공감을 이끌어낸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177185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Movement of the Hangang School Ties(寒岡學團) and Activity of the Local Gentry in the Seongju area from the late 16th century to the early 17th century","authors":"Hyeongsu Kim","doi":"10.17948/kcs.2017..77.257","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257","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4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1702759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이상 산호편(珊瑚鞭)의 치정(癡情)과 정치(政治) -「종생기」를 중심으로-","authors":"고현혜","doi":"10.17948/KCS.2017..77.105","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105","url":null,"abstract":"「종생기」의 산호편 고찰을 위해 4가지 내용을 담았다. \u0000첫째, 「종생기」의 두 자서전을 토대로 탕아 이상의 삶과 문학의 일체화를 논의하고, 산호편을 규명했다. 산호편의 주제는 쓰레기와 우거지의 간음관계인데, 그 본령은 연애소설이 보여준다. 산호편은 유곽에서의 삶과 같은 현실을 삶에서 육화해낸 형태로 폭로하는 글쓰기인데, 이것이 악역(惡疫)을 접신한 무당의 부적으로 명명된다. \u0000둘째, 산호편 주제의 발상 단계를 살핀 후, 이 주제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고리키의 인텔리겐차와 창녀 주제를 변용해 설정되었음을 밝혔다. 산호편의 남녀는 ‘박제된 천재로서의 쓰레기’와 ‘여왕봉·미망인으로서의 우거지’이다. \u0000셋째, 산호편과 관련된 사상과 식민지 현실의 문제를 고찰했다. 이상은 지식인과 창녀 주제를 산호편의 공통주제로 전면화하는데, 그 이유가 근대 풍경의 핵심으로 이 주제를 추상화해냈으며 한국근대문단을 교란시키고 자립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u0000넷째, 산호편의 ‘불의의 양면’과 ‘나’의 삼천갑자로의 변신을 고찰한다. 이상은 산호편의 치정(癡情)을 정치(情痴)로 표현하는 언어유희로 그 불의의 양면이 식민지 종주국과 피식민지의 상호관계를 겨냥한 것임을 드러낸다. 한편 죽은 ‘나’는 삼천갑자로 변신, 환생하는데 이는 죽음 후 문학의 생을 위한 기획이다. \u0000이상은 산호편의 내용과 본의를 독자들이 궁구하고 통찰하도록 이끌기 위해 「종생기」를 기호론적 독해를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로 만들어 죽음 이후 독자와의 문학적 대결을 예비해놓는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73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1710627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효현왕후옥책문(孝顯王后玉冊文)』 해제","authors":"Shin Kyung-Sook","doi":"10.17948/KCS.2017..77.519","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519","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4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1521377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일본 중세 동아시아 교류사 현상과 과제","authors":"코지 이토","doi":"10.17948/KCS.2017..77.359","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359","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30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14383031","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Recognition of Seo Gyeong-deok’s scholarship of Yang Eung-su, the eighteenth century Noron intellectual","authors":"S. Cho","doi":"10.17948/KCS.2017..77.381","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381","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3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189682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Hong Dae-yong(洪大容) and Lǚ Liú-liáng(呂留良)","authors":"Myoungho Kim","doi":"10.17948/KCS.2017..77.425","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425","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388418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Dasan’s Righteous Case and the Status of Chunchugojing","authors":"Sungkun Jeon","doi":"10.17948/KCS.2017..77.451","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451","url":null,"abstract":"","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3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413917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Projects of the Socialism National Language by Lim-hwa and Hong Gi-mun in the middle 1930's","authors":"임동현","doi":"10.17948/kcs.2017..77.287","DOIUrl":"https://doi.org/10.17948/kcs.2017..77.287","url":null,"abstract":"임화와 홍기문은 조선어학회의 언어규범화운동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민족어를 주장했다. 임화와 홍기문은 민족을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했고, 그 안에 프롤레타리아적 문화요소를 채우는 것을 사회주의 민족문화라고 보았다. 민족어도 언어가 사회경제적 조건에 규정된다는 유물론적인 인식과 언어의 발전은 언어 간의 상호접촉으로 진행된다는 언어관을 기반으로 해야한다고 했다. \u0000임화와 홍기문은 사회주의 언어관을 바탕으로 다수 인민이 사용하는 일상어를 표준어로 제시했다. 조선어학회의 표준어가 노동계급의 언어를 간과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언어를 강제한다고 비판했다. 현재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경제적 한계로 인해서 독자적인 문화수립의 역량이 없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언어규범화운동을 사회주의자들이 대신 진행해야 했다. \u0000임화와 홍기문이 말하는 다수 인민은 노동자·농민이었다. 이들은 언어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고, 고유한 조선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준어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임화와 홍기문은 사회주의 민족어를 만드는 방법론에 있어서 입장이 달랐다. 언어 학자였던 홍기문은 민족어 규범의 통일화와 표준화에 필요한 근대적 시스템이 식민권력에 장악되어있기 때문에 언어규범화운동은 해방 이후의 사업이고, 식민지 상황에서는 조선어 정리만 해야 한다는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반면에 임화는 사회주의 문학가들을 통한 민족어 형성을 구상했다. 문학을 통해서 노동계급의 일상어를 표준화하고 문학작품을 통해서 전국적인 통일화를 이루려고 했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2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17-11-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7478272","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