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A Study on the Location of Mokjikuk","authors":"JinKook Jeon","doi":"10.37331/jkah.2023.9.111.39","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39","url":null,"abstract":"마한 목지국은 『삼국지』 한전에서 진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특별히 언급된 나라이다. 진왕은 우월한 수장이므로, 목지국 역시 마한의 여러 나라 중 가장 큰 대표 국가로 여겨진다. 삼한의 대국은 주변의 소국을 거느리거나, 대국 안에 소국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삼한 대국의 모습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마한’과 같은 양상이다. 백제본기의 ‘마한’은 백제 남쪽에 있던 대국이다. 목지국과 백제본기에 등장하는 마한은 같은 실체라 판단한다.BR 목지국의 이름은 백제의 대목악군, 고려 시대의 목주, 그리고 오늘날 목천이라는 지명으로 연결된다. 목천은 오늘날 천안 소속이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청주 소속이었다. 청주 오송·송절동·봉명동 유적은 삼한 시기의 대규모 유적이다. 그들 유적이 목지국의 국읍이라 판단하며,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미호강 유역의 진천, 목천, 청주, 오송, 세종 일대를 목지국 진왕의 직접적인 통치 범위라 추정한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6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72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Reconstruction of the Observation Record List of Korea’s Ancient Comet and its Modern Scientific Interpretation","authors":"Kichul Shin","doi":"10.37331/jkah.2023.9.111.363","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363","url":null,"abstract":"혜성은 일식·월식과 함께 고대인들에게 두려움을 준 천변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한국의 고대 사료에 혜성 관련 관측기록 횟수를 63회로 파악했다. 그러나 『晉書』를 근거로 혜성 관련 용어를 분석하니 彗星과 孛星(星孛)·蚩尤旗로 표현된 것들은 그대로 혜성 기록으로 볼 수 있었으나, 妖星·客星·長星·大星의 기록들은 혜성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없거나 다른 天變인 사례가 드러났다. 이러한 결과로 한국의 고대인들은 51개의 혜성을 관찰하고 53회의 기록을 남겼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BR 그리고 관측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三國遺事』의 融天師 彗星歌의 혜성이 어떤 혜성인지도 확인해 보았다. 이 혜성은 신라의 진평왕 재위 때 나타났다고 하는데, 彗星歌의 창작시기를 밝히는 근거로도 활용되었다. 앞서 수행한 혜성 분석을 활용하여 전 세계 혜성 관측기록 19개를 뽑아 각각 분석했다. 그 결과 608년 가을에 관측된 혜성 기록이 융천사의 혜성 위치인 心大星과 가장 근접했음을 확인했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3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85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Political situ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Dongseong(東城王) and the rebellion by Baekga(苩加)","authors":"miae Jang","doi":"10.37331/jkah.2023.9.111.263","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263","url":null,"abstract":"본고에서는 동성왕의 즉위 배경과 즉위 후 정국 운영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동성왕 시해 사건과 苩加에 의한 반란의 의미에 대해 재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한성의 함락 이후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한 문주왕은 倭에 체류 중이던 곤지를 불러들이는 한편 아들인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며 정국을 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 문주왕에 의해 內臣佐平에 임명된 곤지는 개로왕 대에 征虜將軍 左賢王에 책봉되었으며, 이후 왜에 파견되어 왜에 이주해 있던 백제인들을 통합하고 왜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곤지의 귀국은 문주왕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으며, 곤지는 내신좌평에 임명된 후 사망하기 전까지 다양한 정치 세력과 왕실 세력을 규합하는 책임자로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곤지의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규합된 세력들은 이후 동성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지지 기반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동성왕 전반기 對고구려전의 전개와 북방을 중심으로 한 관방의 정비 등은 이들 세력에 의해 추진된 정책 방향으로 볼 수 있다.BR 그러나 동성왕은 재위 11년 만에 天地제사를 지내고 南堂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정국 운영 방향의 一新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사비로의 전렵이나 耽羅에 대한 정벌을 내세운 무진주로의 幸行은 백제의 관심이 북방보다는 남방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사비로의 전렵은 사비로의 천도를 염두에 둔 행위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동성왕 후반기 정국 운영 방향의 변화는 정치 세력 구도에도 변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동성왕 전반기에 활동했던 정치 세력들의 위기의식을 불러왔으며, 그것이 결국 동성왕 시해 시도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BR 동성왕 시해의 중심인물로 『삼국사기』에서는 苩加를 지목하고 있으나 동성왕 대 전체를 걸쳐 최측근으로써 활동했던 백가가 동성왕을 시해하고자 한 뚜렷한 목적이 찾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동성왕 시해 시도 이후 가림성에서 머물렀으며, 무령왕 즉위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항복하는 등의 백가의 행적은 그가 동성왕을 시해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본서기』에서는 ‘國人’에 의해 동성왕에 대한 시해 모의가 있었으며, 백가는 그들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國人’은 동성왕 전반기 세력들로 볼 수 있다. 백가의 난이 일어난 후 ‘國人’ 세력은 백가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거함으로써 추후 일어날 수 있는 시해 사건을 둘러싼 진실 공방에 대한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동시에 ‘국왕 시해자 백가’를 처단했다는 명분을 통해 정권 교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한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5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85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Contents and Uses of Baekje Wooden Slips Excavated at 49-2 Dongnam-ri, Buyeo: Focusing on No.1·2","authors":"Changseok Kim","doi":"10.37331/jkah.2023.9.111.303","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303","url":null,"abstract":"목간 1의 앞면의 서식은 金이 〈언제 얼마가 들어와서[內已] 언제 얼마가 나갔고[亡] 어디에 쓰였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출분이 亡이라고 표기되었고, 夫逆金은 바로 지출의 내역에 해당하며 그 중량이 빠짐없이 구체적 수치로 기재되었다. 그리고 지출된 부역금의 분량만큼이 수납되어 內已라고 기록되었다. 작성자는 3~4개월 단위로 金工品을 비롯한 고급 수공업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금속 재료를 출납하면서 그 상황을 기록했다.BR 뒷면은 앞면에 나오는 부역금 지출의 세부 내역을 용도에 따라 적었다. 그러나 부역금의 전체가 아니고, 그 가운데 非常의 지출 사항이 특기되었다. 앞·뒷면은 모두 備忘用의 記錄簡이며, 일정 수준의 금 재고량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지출량과 사용 내역을 확인하고 이를 곧 바로 상부 기관에 보고·청구하기 위한 것이 목간 1을 작성한 제일의 목적이었다. 이를 기초자료로 하여 결산 장부 혹은 상부 기관에 대한 재고량 확인 보고 등을 작성할 때 이용한 후 폐기했다고 보인다.BR 목간 2는 완성본에 가까운 장부류의 문서 목간이다. 〈役名+이름+연령등급+稗의 분량〉형식으로 피를 지급한 내역을 정리하여 기록했다. 역명에 해당하는 凡進의 내용은 미상이지만 泗沘都城 내의 국가적 사업에 동원된 인원에게 어떤 役에 대한 대가로 정액이 지불된 사실은 유의할 만하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4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73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The three kingdoms’ relations with China and biǎowén(表文)","authors":"ChanU Park","doi":"10.37331/jkah.2023.9.111.223","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223","url":null,"abstract":"삼국은 4세기 이래 중국왕조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고 대체로 외교문서로써 표문을 사용했다. ‘奉表稱臣’이라는 상투어에서 볼 수 있듯이, 표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삼국의 표문은 조공·책봉관계, 나아가 군신관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이 표문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의 조공·책봉관계(군신관계)는 그 名과 實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삼국의 표문 사용에 대해서는 이를 단순히 중국왕조에 대해 정치적 상하관계를 표방한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BR 기록상 고구려는 3세기 전반, 백제는 5세기 초, 신라는 7세기 초에 표문 사용 사실이 처음 확인된다. 물론 삼국의 표문 사용 개시 시점은 기록보다는 좀 더 앞설 가능성이 있지만, 대체로 위의 시점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삼국의 표문 형식이나 거기에 사용된 어구 등은 대체로 동시기 중국왕조의 表式과 큰 차이는 없었다. 표문의 작성은 당초 낙랑군 등 변군출신이나 중국계 유민이 담당했지만, 한자문화의 확산과 유학 교육 실시 등을 계기로 점차 삼국 내에서 양성된 문인이 이를 대신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BR 삼국은 대체로 중국왕조의 表式을 준수하거나 군신관계와 관련된 다양한 어구를 적극활용하여 표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준수는 일종의 외교전략에 가까웠다. 삼국이 표문의 성격을 이해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한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삼국은 대개 ‘奉表稱臣’함으로써 중국왕조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실리를 얻는 데 중점을 두었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2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864","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The War of Posangpalguk and the Change of Relations between Gaya and Silla","authors":"Kayoung Shin","doi":"10.37331/jkah.2023.9.111.159","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159","url":null,"abstract":"이 글에서는 포상팔국 전쟁을 중심으로 가야 제국의 존재형태를 검토하여 가야의 소국들이 신라와 같이 통합되지 않았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신라가 포상팔국 전쟁에 개입했던 배경과 목적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가야와 신라의 관계의 변화 양상을 정리했다.BR 포상팔국 전쟁은 가야 내부의 동향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기에 관심 있게 연구되었고 가야 사회의 주요한 변화의 계기로 분석되었다. 그런데 포상팔국 전쟁을 통해 3세 기대의 가야사의 내부 양상을 일부 복원할 수 있지만, 가야 전체의 사회가 연동되어 변화했다고 파악하기는 어렵다. 포상팔국 전쟁은 금관국의 변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고, 신라와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면, 안라는 포상팔국 전쟁에 참전했는지는 불확실하며, 내륙에 있었던 고령의 대가야는 포상팔국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포상팔국을 소가야연맹으로 상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며, 지역적 범위에 대해서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포상팔국 전쟁을 가야 내부의 사건으로 한정하여 파악하는 관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BR 금관국은 신라와 이웃하고 있었기에 때로는 대립했지만 서로 힘을 합쳐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浦上八國’ 전쟁이다. 하지만 금관국은 포상팔국 전쟁과 낙랑·대방군의 소멸로 인한 교역체계의 변동 속에서 낙동강 하구의 교역권을 점차 신라에 의해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금관국은 주변의 소국을 복속시키거나 통합하지 못하고 점차 약화되었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43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58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Historical Background and Significance of the Baekje Royal Family’s Origin of Buyeo","authors":"Sanghyun Han","doi":"10.37331/jkah.2023.9.111.331","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331","url":null,"abstract":"백제는 4세기 동진에 조공한 이래 왕실의 부여출자설을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왕실의 출자를 주장한다는 것은 왕실 혈통의 신성성을 강조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목적이 있기에 출자의 대상으로 지목된 존재는 당대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백제는 중원왕조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출자를 주장하였기에 부여는 중원왕조에게서도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백제 왕실의 출자 대상으로 지목된 부여가 백제에게 어떤 국제적, 국내적 가치가 있었는지 밝혀냄으로서 백제 왕실의 부여출자설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고찰하는 것이다.BR 부여는 전한대까지는 명확한 외교관계가 보이지 않으며 경계해야 할 이민족 중 하나였다. 하지만 후한대에 이르자 외교관계를 확립하고 심지어 순제 때는 부여왕이 직접 입조하여 군신의례를 행하게 된다. 이후 부여는 『삼국지』와 같은 역사서에 긍정적으로 묘사되게 된다. 이는 부여가 중원왕조에게 ‘동이의 번국’을 표상하는 역사적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원왕조의 부여인식은 백제가 왕실 출자의 대상으로 부여를 지목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BR 또한 백제가 부여출자설을 주장한 것은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는다고 하는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백제에게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백제의 전신인 삼한제국에서는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인수, 의책을 사여받는 것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있었다.BR 하지만 313년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 대방군이 붕괴함에 따라 변군과의 교섭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에 변군과의 교섭과 달리 당대의 중원왕조였던 동진과 직접 교섭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역의 군장 정도로는 부족했기에 백제는 외교전술의 일환으로서 부여출자를 주장했을 것이다. 즉, 백제 국내의 지배층은 동진의 책봉을 받은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백제 왕실은 높아진 권위를 바탕으로 삼한지역에서 자신을 우위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73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73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Philological Review of the Han Dictionary(韓傳) of the Sanguo-zhi(三國志) and Houhan-shu(後漢書) - New understanding through text modification -","authors":"Yonggu Yun","doi":"10.37331/jkah.2023.9.111.111","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111","url":null,"abstract":"『삼국지』와 『후한서』 「韓傳」에 대한 교감을 통하여 텍스트의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중화서국 點校本을 저본으로 하고, 송원대 이래 版本, 그리고 刊刻 이전 필사본 시기 「韓傳」을 인용한 연대기 자료를 對校하였다.BR 교감 결과 字句의 차이는 대체로 7:3의 비율로 필사본 시기의 자료에서 발생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 한전에서 나타난 공통된 특징이다. 자구의 차이는 비슷한 字形으로 변형된 訛字, 古字 기피·필획이 간략화된 俗字가 성행하였으며, 이는 刊刻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실제 『삼국지』는 36자, 『후한서』는 11자의 오자가 확인되었다. 오자는 필사본 시기의 자료에서 대부분 확인되었다.BR 誤字와 함께 텍스트의 원형을 훼손한 주된 요인은 脫文이다. 『삼국지』는 7개소 27자, 『후한서』는 6개소 65자가 확인되었다. 특히 『후한서』의 탈문을 통해 『삼국지』에 본래 있었던 자구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脫文은 전후 문장을 교란시키고, 남은 자구는 본래 위치를 벗어나 倒文이 되었으며, 다시 문맥 연결을 위해 불필요한 衍文까지 초래하였다.BR 이는 版本만으로는 텍스트상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필사본 시기 「한전」 텍스트는 原書와 다수의 注本이 작성·유포되었으며, 나아가 두 사서 「한전」의 혼용도 나타났다. 이처럼 현재의 「한전」은 陳壽와 范曄이 저술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을 중시하거나, 우열의 관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후한서』 한전은 439년 范曄이 저술 당시 보았던 『삼국지』 「한전」 텍스트를 추정할 수 있는 측면에서도 새롭게 보아야 할 것이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22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86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Yadu State’s Location and Role in Cultural Exchange between Han and Lelang","authors":"Namjung Kim","doi":"10.37331/jkah.2023.9.111.5","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5","url":null,"abstract":"이 글은 야두국을 통해 韓과 중원 세력(낙랑군 포함) 간의 근거리 교역의 한 형태를 밝혀 보고자 하였다. 야두국은 『漢書』 지리지에는 야두매현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영동 7현 중 하나로 낙랑군 동부도위에 소속되었다가 후한 대에 후국으로 전환된 국가이다. 100년경에 許愼이 쓴 『說文解字』에 야두국으로 언급되어 있다.BR 야두국은 『설문해자』에서 민어와 새우가 나온다고 한 점에서 황해에 접근하기 쉬운 임진강 일대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은 동북한과 같은 문화권에 속했기 때문에 동부도위에 함께 묶였던 것이다. 특히 임진강 하류의 장단 지역은 고구려 때 약(야)두치현이었다고 전하여 야두국으로 비정할 만하다. 또한 지금의 영동 개념은 고려 말 이후의 것으로, 1~3세기 무렵에는 낙랑 동남쪽의 경계는 태백산맥이 아닌 마식령산맥이었다. 특히 영동의 예는 후한 말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하는데, 임진강 및 강원 서부 일대에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인 적석총과 유사한 무덤이 확인된다. 이러한 야두국은 예족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크게 보면 예맥의 하나였으며 맥으로 지칭된 경기 동부 및 강원 일대의 ○○매 세력과도 같은 계통이었다.BR 임진강 일대를 포함한 경기·강원 일대에서는 낙랑(계) 문물이 많이 확인되고 있어 야두국 등 예맥 지역으로 유입된 낙랑 문물이 韓 지역으로도 유입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야두국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갈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삼국사기』의 예맥계 세력의 활동 양상을 통해 전쟁, 주민 이주, 평화적 교류 등 다양한 방법에 의해 예맥 지역으로 유입된 낙랑 문물이 한에도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72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TheFormation and separation process of Jin ·Byeonhan from an archaeological perspective","authors":"Jinson Cho","doi":"10.37331/jkah.2023.9.111.75","DOIUrl":"https://doi.org/10.37331/jkah.2023.9.111.75","url":null,"abstract":"청동기시대 전기 영남지역에는 역삼동-흔암리유형이 분포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 중기에 송국리유형이 파급되면서 송국리유형권과 검단리유형권으로 구분되고, 낙동강과 태백산맥 사이에는 양 유형의 병존지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8~7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이어졌다. 기원전 2세기 후엽 중서부지역에서 세형동검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됨에 따라 기원전 2~1세기에는 토착적인 송국리유형 및 검단리유형과 외래적인 세형동검 문화가 공존하게 된다. 전자는 부족사회 성격을 띠지만, 후자는 군장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어서 성격을 달리하는 문화유형들이 중층적 구조로 공존한 것이다. 이로 보아, 진한은 기원전 100년경부터 세형동검문화와 낙동강 이동의 범검단리유형이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이고, 변한은 세형동검문화와 낙동강 이서의 송국리유형이 결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BR 진한과 변한은 모두 세형동검문화가 상층부를 구성하며, 기층을 이루는 검단리유형과 송국리유형도 별다른 갈등관계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화적으로 서로 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에 제사 지내는 일은 서로 다르다고 하였는데, 수렵·채집사회 전통이 강한 검단리유형과 농경사회 전통이 강한 송국리유형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김해·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송국리유형권에서는 지석묘를 비롯한 무덤들이 많이 확인되지만, 검단리유형권에서는 무덤들이 그다지 많이 확인되지 않은 것 역시 이러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PeriodicalId":471810,"journal":{"name":"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volume":"1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82860","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