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A Study on the Successful Candidates from Jungju in Mun-gwa in the Latter Period of Joseon Dynasty","authors":"Kwang man Choi","doi":"10.15704/kjhe.45.3.202309.147","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3.202309.147","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조선 후기 과거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평안도 정주에 주목하여, 문과 급제자의 특성과 급제자 증가의 요인을 조사한 내용이다. 연구 대상은 『정주읍지』(1899), 『신안지속편』(1933), 그리고 역대인물정보시스템 등에서 확인한 297명의 정주 출신 문과 급제자이다.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주 출신 문과 급제자의 시험별 분포는 297명 중 256명(87.2%)이 식년시에 집중되어있다. 여기에 성균관 과시의 전강에서 직부전시를 받아 급제한 인원까지 포함하면 총 280명(94.3%)이 되어 식년시 관련 급제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둘째 전력별 분포는 유학 273명(91.9%), 생원·진사 6명(2.0%), 관품관직자 17명(5.7%)으로 유학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정주의 유생들은 생원진사시나 문과의 다른 시험보다는 식년시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문과 급제자 증가 요인으로는 성균관 과시를 들 수 있다. 정주 출신 문과 급제자는 영조 대부터 급증하는데, 정주 유생은 성균관 과시, 특히 전강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다음 식년시에 급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넷째 문과 급제자 증가의 또 다른 요인으로는 다수의 서당이 설립되고 우수한 훈장이 교육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다수의 서당과 훌륭한 훈장은 정주의 교육적 기반이 되는 것으로서, 정원현 강등과 같은 시기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는 원동력이 되었다.","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5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3788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Gyeongseong Kindergarten Normal College and Women’s Higher Education","authors":"Ja Joong Kim","doi":"10.15704/kjhe.45.3.202309.75","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3.202309.75","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경성보육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같은 시기 여성의 고등교육과 관련하여 이 학교가 갖는 의의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성보육학교가 설립된 배경에는 유치원 수의 증가와 이에 수반한 보육전문인력 ‘보모’ 수요의 확대가 있었다. 1920년대에 유치원 수는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각 유치원은 기왕이면 보모 중에서도 보모양성과정을 이수한 사람을 채용하려 했다. 둘째 경성보육학교는 여자중등학교 졸업자에게 다수의 고등교육기회를 제공했다. 경성보육학교의 재학생 수는 1933년부터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입학자의 출신학교를 보면, 사립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다. 셋째 경성보육학교의 교육과정은 일본 내 보모양성기관의 교육과정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경성보육학교는 음악과 율동에 주력했다. 또한 1933년 이후에는 일본 내 보모양성기관 유학출신 교원을 다수 채용했으며, 교과서도 일본인 저자의 저서를 다수 사용했다. 넷째 경성보육학교는 다수의 보모를 배출했다. 경성보육학교의 재학생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졸업자 수도 점차 증가했다. 이들은 주로 보모로의 취직을 지망했으며, 실제로도 그중 대다수는 보모로 취직하는 데에 성공했다. 다섯째 전시체제기에 경성보육학교는 폐교됐다. 해방 이후 1946년에 전 경성보육학교 교원들과 졸업자들이 동교를 재건하려 했지만, 결국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2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37885","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On the educational book Hakmunsamyo(『學問三要』) compiled by Song Byung-soon","authors":"Soon-ok Ku","doi":"10.15704/kjhe.45.3.202309.1","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3.202309.1","url":null,"abstract":"본고는 근대 유학자이며 교육자, 순국지사인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의『학문삼요』를 살펴보고 편찬의 의의를 밝힌 것이다. 『학문삼요』는 학문의 요체를 독서, 존양성찰(存養省察), 천리(踐履) 세 가지로 규정하고 주희, 이황, 이이, 김장생, 송시열의 글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을 채록하여 1891년(고종 28) 그의 나이 53세 때 편찬한 교육서이다. 송병순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으로, 가학을 바탕으로 큰아버지 송달수(宋達洙, 1808∼1858)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로, 그의 형 송병선(宋秉璿, 1836~1905)과 함께 연재학파를 형성하여 1,100명의 직전 제자를 양성한 교육자이다. 그간 학계에서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는데, 대부분 그들의 생애와 민족운동, 연재학파 형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우국지사라는 관점에 치우쳐 그들이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연구가 부족한 상태이다. 송병순은 35권 15책의 문집 『심석재집(心石齋集)』과 『학문삼요』, 『주서선류(朱書選類)』, 『고금필첩(古今筆帖)』,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등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번역이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략한 해제작업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작품도 있다. 이 저술들은 그의 학술과 사상, 강학 활동 등을 실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이므로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학자, 교육자로서의 모습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 현재『학문삼요』는 다수의 목판본과 필사본이 남아있는데 1903년, 1907년, 1927년 3차례 간인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편찬 취지와 과정, 구성과 방법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당시 조선의 국권은 상실되어 가고 서학이 유입되어 정통 유학의 권위는 무너지고 기존의 유교적 질서는 붕괴되는 상황 속에서 송병순이 선현의 저술 가운데 학문의 요체를 담은 글을 발췌하여 편찬한『학문삼요』는 바로 독서를 통해 배우고 타고난 본성의 회복하고 자신을 살피며 이를 실천하는 유교적 학문을 되살리고자 한 바람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4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37889","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Students’strikes and its positions in the 1910s mission school","authors":"Kyung Sook Lee","doi":"10.15704/kjhe.45.3.202309.109","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3.202309.109","url":null,"abstract":"본 연구의 목적은 먼저 맹휴(동맹휴학/동맹휴교)의 교육적 의미를 규정하고, 두 번째로 1910년대중등과정 미션스쿨에서 발생한 맹휴의 실태를 알고자 맹휴 사건들을 발굴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맹휴를 분석하는 방법은 맹휴를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당사자 관점에 관한 조명이다. 당시 미션스쿨에서 발생한 맹휴를 검토한 결과, 미션스쿨 중에서 감리교 학교보다는 장로교 학교에서 좀더 자주 맹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맹휴는 특정 사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개별 학교 단위에서 일어났다. 맹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교원배척이었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목소리와 상황들이 담겨있었다. 특히 1915년 사립학교규칙이 개정된 후, 고등보통학교나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지 않았던 장로교 미션스쿨 학생들 사이에는 더 나은 교육에 대한 열망과 학교승격의 요구가 맹휴로 이어졌다. 그리고 1916년 말 계성학교의 맹휴는 맹휴 관련자들의 상이한 입장을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맹휴의 실태를 깊이있게 분석할 수 있게 하는 사례였다. 학교 측 교무일지, 경찰의 보고공문, 학생 김태연(김단야)의 회고까지 남아 있어 각각 맹휴를 바라보는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는 양비론적 입장, 경찰은 불온감시자의 시선, 학생은 교육과 정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45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3807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A Study on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military education policies for students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authors":"Seonghak Kim","doi":"10.15704/kjhe.45.3.202309.47","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3.202309.47","url":null,"abstract":"일제는 현역장교를 학교에 배속하여 실시한 군사교련을 정책적으로 매우 중시했다. 이는 당시 학교교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본 연구는 이 군사교련 정책의 전체 변동 과정을 밝히고 그 동인이 무엇이었는지 도출하고자 했다. 일제시기 조선인 학생에 대한 군사교련 정책은 네 단계를 거치며 변동하여 갔다. 제1단계는 군사교련 원천 봉쇄 시기였다(1910~1925년). 한말 병식체조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던 시기로서 일제는 체조과 교과과정과 학교체조교수요목에서 군사훈련 관련 교재를 배제했다. 제2단계는 군사교련의 도입과 제한적 추진 시기였다(1926-1927년). 일본본국의 방침에 따라 군사교련 정책을 시행하지만 여전히 조선인 군사교련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조선인의 경우, 경성사범학교 학생들만이 군사교련의 대상이 되었다. 제3단계는 군사교련의 점진적 확대 시기였다(1928~1936년).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군사교련의 훈육적 효과에 주목하여 관공립 공학제 학교에서부터 점차 조선인 고등보통학교까지 확대했다. 제4단계는 군사교련의 전면적 확대 강화 시기였다(1937~1945년). 군사교련의 목적을 국방능력의 증진으로 재설정하고 전시동원체제를 적극 후원했다. 군사교련을 대학 학부에서 필수화하고, 사립 전문학교와 중등학교까지 확대했다. 군사교련수업에 대한 통제와 내용을 강화했다. 일제시기 군사교육 정책의 변동을 야기한 근본적인 동인은 식민지 체제에서 군사교육 자체에 내재된 이중성에 있었다. 식민통치자에게 군사교육은 가능성과 위험성을 지닌 양날의 칼이었다. 일제시기 군사교육 정책의 변동 과정은 이 위험성에 대한 경계에서 가능성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간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13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37886","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Achievements and Challenges of Education History Research","authors":"Dae-Sik Kim","doi":"10.15704/kjhe.45.3.202309.23","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3.202309.23","url":null,"abstract":"이 글에서는 교육사학 연구공동체가 거쳐온 역사를 점검하고 교육사학 연구공동체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였다. 지난 50여 년간 교육사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어떤 주제로 연구를 해왔고, 어떤 관점과 연구방법을 취했는지 살펴보았다. 연구자는 1967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교육사학회의 학술활동을 중심으로 그간의 학술활동을 고찰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교육사학회의 학술 활동 변천을 다음 세 시기로 구분하였다. 1) 교육사학 정체성과 연구 방법을 모색하던 시기, 2) 실증주의 역사 연구의 정착과 도전에 직면한 시기, 3) 교육사학 고유 서사의 형성 시기이다. 시기 구분의 기준은 교육사 연구에 대한 성찰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세 시점으로 설정하였다. 창립기에 해당하는 첫 번째 시기는 학회 창립 후부터 1989년까지로 설정하였다. 창립 후 20여 년이 지난 뒤 교육사 연구 동향에 대한 자성적 논의가 이루어진 1989년을 첫 번째 시기 구분 기준점으로 삼았다. 두 번째 시기는 1990년부터 2010년으로 설정하였다. 이 시기의 구분 기준도 2010년에 한국교육사 연구동향에 대한 성찰과 전망을 논의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시기는 2011년부터 2023년까지로 설정하였다. 2023년 현재 한국교육사학회는 60주년을 앞두고 이전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연구자는 시기 구분을 통해 교육사학이 지난 60년간 나름의 독자성을 갖추기 위한 고민과 극복을 해왔음을 보였다. 교육사 분야의 교육학 내 위상 강화와 교육사 연구 방법의 다양화, 교육사 연구 대상의 확대를 제안하였다.","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130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5037743","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A Research Trend of the History of Education in the United States","authors":"Wooyeong Kim","doi":"10.15704/kjhe.45.2.202306.133","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2.202306.133","url":null,"abstract":"","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204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6-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180170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Regret of retirement age","authors":"Sun-ei Joung","doi":"10.15704/kjhe.45.2.202306.143","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2.202306.143","url":null,"abstract":"","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41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6-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4264897","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Analysis of the Pass Process of Passers ofCivil Service Examination(文科) during the in King Jeong-jo reign","authors":"Sangjun Jeong","doi":"10.15704/kjhe.45.2.202306.77","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2.202306.77","url":null,"abstract":"","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139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6-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34028105","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
{"title":"The Analysis of List of Instructor of Juvenile Educationin the late Joseon Dynasty","authors":"Youn-ho Park","doi":"10.15704/kjhe.45.2.202306.1","DOIUrl":"https://doi.org/10.15704/kjhe.45.2.202306.1","url":null,"abstract":"","PeriodicalId":256932,"journal":{"name":"The History of Korean Education","volume":"28 1","pages":"0"},"PeriodicalIF":0.0,"publicationDate":"2023-06-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null,"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122135498","PeriodicalName":null,"FirstCategoryId":null,"ListUrlMain":null,"RegionNum":0,"RegionCategory":"","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EPubDate":null,"PubModel":null,"JCR":null,"JCRName":null,"Score":null,"Total":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