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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ereabouts of Expressionism or Anarchist Proletarian Art Theory in the 1930s
1928년 12월에 결성된 미술단체 ‘녹향회’가 이듬해 5월에 개최한 제1회 녹향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김주경과 함께 녹향회를 이끌었던 심영섭의 작품에 대해서 찬반양론이 뜨겁게 펼쳐졌다. 심영섭의 작품이 원근법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 시를 써 넣는 등 실험적인 형식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안석주와 임화는 비판적이었던 반면, 이태준은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미술작품을 객관적 세계의 ‘재현’으로 보는 사실주의적 예술관과 예술을 작가의 내면적 세계의 ‘표현’으로 보는 표현주의적 예술관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제1회 녹향전이 종료된 후 심영섭은 자신의 예술관을 직접 피력한 「아세아주의미술론」을 발표했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은 이 글을 동아시아의 연대라는 의미로 이해해 왔지만, 심영섭은 기계론적 서구문명(동아시아에서 서구적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을 포함)이 몰락할 것으로 바라보면서 동양에서 발전시켜 온 인간 중심의 문화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녹향회의 이념으로 제시되었던 ‘초록고향’의 실제 의미이기도 한 이러한 아세아주의론은 정치적으로 아나키즘과 연결되어 있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아나키즘과 표현주의 미술은 점차 위축되었고, 심영섭은 그림 창작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용준과 이태준 또한 실험 정신을 내세우기보다 전통으로 회귀한 듯한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그들이 회화적 전통으로 인정한 장승업의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미학적 척도는 여전히 표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렇듯 표현주의라는 맥락에서 이태준을 바라본다면, 1930년대에 모더니스트들의 집단을 이끈 것이나 1945년 이후 문단에서의 인민전선에 가담한 것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