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摘要
艺术家在不同环境中的经历会对他的活动及艺术产生怎样的影响呢?而且,这样形成的画家个人的价值观和作品如何被接受、解释和评价?这篇论文具有同一志向,专心创作,但日本近代美术史中的评价是相反的佐有助于(佐伯祐三,1898—1928)和山田太一(山田新——,1899年至1991)的履历和艺术馆,艺术家的关注和体验移动他们的艺术(馆)及美术界形成影响在想了。佐木和山田在官学东京美术学校一起学习,追求了令当时日本的年轻美术学生狂热的前卫绘画风格。这两位画家走造型上的不同之路是1923年发生的关东大地震的直接契机。与到近代西洋画家的“圣地”法国留学的泽木不同,山田逃到了家族居住的朝鲜,这种不同的越境鲜明地分裂了两位画家的艺术人生。在法国留学的佐波立体派的代表性选手布拉曼克(maurice de vlaminck, 1876—1958)通过与创作活动的迎来了一个转折点,但朝鲜走向“艺术的不毛之地的山田来说“成熟的”朝鲜美术启蒙界,得到领导的任务的。本高中立足于这样的事实,比较研究佐木和山田的法国儒学及山田的朝鲜活动,从多方面思考日本近代西洋画家对法国、日本、朝鲜美术界的认识和艺术观。
‘Center and Periphery’ in Modern Art : Focusing on the Arts of Shinichi Yamada
예술가의 각기 다른 환경에서의 경험은 그의 활동 및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 칠까.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화가 개인의 가치관과 작품은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 되며 평가될 수 있는가. 이 논문에서는 동일한 지향점을 지니고 창작활동에 전념 하였으나 일본 근대미술사 내에서의 평가는 상반되었던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1898~1928)와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1899~1991)의 이력과 예술관에 주목하여, 예술가의 이동과 체험이 그들의 예술(관) 형성 및 미술계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 았다. 사에키와 야마다는 관학인 도쿄미술학교에서 함께 수학하며 당시 일본의 젊은 미술학도들을 열광케 한 전위적 회화 스타일을 지향했다. 이런 두 화가가 조형적 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1923년 발생한 간토 대지진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 다. 근대 서양화가들의 ‘성지’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사에키와 달리 야마다는 가 족이 머무르고 있던 조선으로 피난했고, 이러한 서로 다른 월경은 두 화가의 예술 인생을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프랑스에 유학한 사에키는 포비즘의 대표주자인 블 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와의 만남을 통해 창작활동의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예술의 불모지’ 조선으로 향한 야마다에게는 ‘미성숙한’ 조선의 미술 계를 계몽하고 지도할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사에키와 야마다의 프랑스 유학 및 야마다 의 조선 활동을 비교 검토하며, 일본 근대 서양화가의 프랑스, 일본, 조선 미술계에 대한 인식과 예술관을 다각적으로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