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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onsan Kim family’s Movement to Chuncheon and the Family’s Activity
최근 춘천의 선산김씨 가문에 소장 중인 일기 자료와 고문서, 고서, 초상화 등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가문의 이거 배경과 활동에 대한 관심이 제고된 바있다. 본 고에서는 가문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청금록』, 『사마소선생안(司馬所先生案)』, 『사마계좌목(司馬稧座目)』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조선 후기 선산김씨(善山金氏) 생원공파(生員公派) 가문의 춘천 이거와 정착 그리고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BR 선산김씨 가문이 춘천으로 이거해 온 요인은 중시조인 14세 농암(籠巖) 김주(金澍)에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주는 1392년(공양왕 4)에 명나라 남경(南京)으로 갔다가 일을 마치고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로 후손들은 여러 대를 거치며 숨어 살게 되었고 그 과정속에서 여러 대에 걸친 선조의 묘소를 잃게 되었다. 이후 춘천부사로 부임한 31세 퇴암(退庵) 김낙수(金樂洙)의 노력으로 19세 김천수(金天授)의 묘소를 찾게 되었고, 묘지의 기록을 통해 선산김씨 가문의 춘천 입향조가 김천수임을 확인하였다. 춘천 선산김씨 가문은 대체로 우정 김경직 대에 지역사회에서 학문적 추앙을 받으며 점차 춘천 지역사회의 유력 가문으로 정착되어 갔고 이후 다수의 입격자를 배출하였으며, 향약 및 사마계 활동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