吉田茂的认知模态逻辑:国际视野、国台与韩国

Soong Bae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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摘要

该研究是在战败之后,对日本的中心人物吉田茂的认识逻辑进行分析得出的结果。第一,从20世纪初开始作为外交官活动的吉田茂以在中国和欧洲工作的经验为基础,很好地了解了世界局势。当时强国之间的合作关系伴随着帝国主义倾向,吉田也追求与英美步调一致的帝国国际主义。第二,主张明治时期日本就有民主主义的吉田茂在1946年制定日本国宪法后,仍然认为天皇中心国体不变。吉田茂意识到的天皇与日本国民的君臣一家关系是可以通过宪法与民主主义融合的。第三,由于6.25战争的爆发,吉田茂制定了以日本和韩国为中心的多边安保构想。作为不能追求军事力量的日本的局限性,吉田不仅将日本设定为非军事地区,还将韩国设定为非军事地区,讨论了东亚势力均衡问题。在这方面,他是一个防御性的现实主义者。第四,为了签署旧金山和平条约,吉田茂想在和平条约中明示韩国独立相关的字句。这意味着认识到了1910年通过《韩国合并条约》,韩国被编入日本的条约的法律有效性,意味着在为恢复日本主权的和平条约中,承认韩国分离的法律逻辑。帝国日本解体了,但吉田一直维持着将过去殖民地正当化的殖民主义。
本文章由计算机程序翻译,如有差异,请以英文原文为准。
Shigeru Yoshida’s Epistemic Modality Logic: International View, Kokutai, and Republic of Korea
이 연구는 패전 직후, 일본의 중심인물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의 인식 논리를 분석한 것이다. 첫째, 1900년대 초반부터 외교관으로 활동한 요시다는 중국과 유럽에서의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정세를 잘 인지했다. 당시의 강대국 간의 협조 관계에는 제국주의적 성향이 수반되었는데, 요시다 역시 영미에 보조를 맞춘 제국적 국제주의를 지향했다. 둘째, 메이지 시기에 이미 일본에 민주주의가 있었다고 주장한 요시다는 1946년 일본국 헌법 제정 이후에도 천황 중심적 국체를 불변한 것으로 인식했다. 요시다가 의식한 천황과 일본 국민의 군신일가(君臣一家) 관계는 헌법을 통한 민주주의와의 융합이 가능한 것이었다. 셋째, 6.25전쟁 발발로 요시다는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한 다자적 안보 구상을 고안했다. 군사력을 추구할 수 없는 일본의 한계로 요시다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비군사 지역으로 설정함으로써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검토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방어적 현실주의자였다. 넷째,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요시다는 한국의 독립 관련 문구를 평화조약에 명시하려고 했다. 이는 1910년 한국병합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에 편입되었다는 조약의 법적 유효성을 인지한 것이며, 일본의 주권 회복을 위한 평화조약에서 한국 분리를 인정하는 법적 논리를 의미했다. 제국 일본은 해체했으나, 요시다는 일관되게 과거 식민지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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