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韩国战争停战会谈与战后体制的成立","authors":"정병준","doi":"10.17792/KCS.2019.36..245","DOIUrl":null,"url":null,"abstract":"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n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n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n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n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0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title\":\"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authors\":\"정병준\",\"doi\":\"10.17792/KCS.2019.36..245\",\"DOIUrl\":null,\"url\":null,\"abstract\":\"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n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n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n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n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10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17792/KCS.2019.36..245\",\"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17792/KCS.2019.36..245","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1년간의 공격·방어전과 후기 2년간의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1951년 7월 개시된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전쟁포로의 처리문제였다. 유엔측은 17만 명의 공산포로를 보유했고, 공산측은 총 1만 3천 명의 유엔포로를 보유했다. 10배 이상 포로 수가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산측은 강제송환을, 유엔측은 자유송환을 주장했고, 휴전회담이 지연되었다.
전선 밖에서도 다양한 압력수단이 사용되었다. 공산측은 포로수용소 폭동을 일으키는 한편 유엔군이 세균전을 자행했다고 비난했고, 이에 맞서 유엔측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 폭격으로 맞섰다.
1953년 봄 휴전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임박하자 한국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이중공세를 펼쳤다. 한편으로 작전지휘권 환수, 단독북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한적 공세를 펴면서, 한편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이에 맞서 이승만 제거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한국군 통제를 위해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둘 것을 요구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편지로 이를 수락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51년 봄 한국전쟁의 위기를 실감한 미국은 관대하고 우호적인 평화조약이자 반공조약을 체결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함께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은 평화와 안보를 교환했다. 한국은 조약서명국은 아니었지만, 이 조약의 영향 속에서 일본과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휴전 이후 남북한은 인적·물적 피해 위에 분단의식, 적대의식이 심화되었다. 한반도에는 적대적 관계가 상존하는 휴전체제가 지속되었다. 휴전 후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네바정치회담이 개최되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되었다. 남북한은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진장과 충돌을 지속했다. 1970년대 이후 해상분계선과 NLL이 충돌의 중심이 되었다.
휴전 이후 조·중·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 전쟁의 개전과 전개과정에서 소련과 스탈린의 결정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소극적이고 방어적 태도를 취했다. 스탈린의 사망이후 소련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되었다. 중국은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격리되었지만, 중국혁명을 보위했고, 북한을 자기 영향력 하에 두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