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釜山绿山洞高丽时代窑址出土青瓷的特征和意义","authors":"김태은","doi":"10.17792/KCS.2019.36..81","DOIUrl":null,"url":null,"abstract":"부산 녹산동에서 고려시대에 대단위 요업을 했던 가마터가 발굴조사되었다. 최초에 도기를 생산하다가 전환하여 청자를 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마를 이동하면서 상당기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총 5기의 가마와 그에 속한 폐기장이 조사되었다. 5만 점이 넘는 출토품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지리적으로 낙동강과 남해안 수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경남지역 일대에 청자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n출토품 분석 결과 요업 성쇠 및 운영시기에 따른 유물의 양식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나 종류와 조형 면에서 비교적 다양하며, 장고·향완·잔탁·매병과 같은 위상 높은 기종이 다수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량의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주목된다. 문양의 수준과 다양성은 떨어지나, 철화를 장식한 기물의 종류와 양은 고려시대 대표적 철화청자 생산지였던 해남 진산리 요장과 비견할만하다. 또한 전세품이나 다른 가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녹산동 청자의 특징으로 금속기를 여럿 모방한 점, 도기와의 여러 유사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은 고려 중기 이후 전국 대부분 청자가마가 최고급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녹산동 가마는 경남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청자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n편년의 표식 유물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이 보이지 않고 통형잔·팽이형잔·매병 등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 기종과 형식이 소수 보이기 때문에 운영시기 하한은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으로 제작된 기종과 형식에서 용운리 10호 Ⅰ층 및 Ⅱ층 가형식, 삼흥리 D지구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 전기적 특징을 주로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요업의 시작은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56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title\":\"부산 녹산동 고려시대 가마터 출토 청자의 특징과 의의\",\"authors\":\"김태은\",\"doi\":\"10.17792/KCS.2019.36..81\",\"DOIUrl\":null,\"url\":null,\"abstract\":\"부산 녹산동에서 고려시대에 대단위 요업을 했던 가마터가 발굴조사되었다. 최초에 도기를 생산하다가 전환하여 청자를 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마를 이동하면서 상당기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총 5기의 가마와 그에 속한 폐기장이 조사되었다. 5만 점이 넘는 출토품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지리적으로 낙동강과 남해안 수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경남지역 일대에 청자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n출토품 분석 결과 요업 성쇠 및 운영시기에 따른 유물의 양식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나 종류와 조형 면에서 비교적 다양하며, 장고·향완·잔탁·매병과 같은 위상 높은 기종이 다수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량의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주목된다. 문양의 수준과 다양성은 떨어지나, 철화를 장식한 기물의 종류와 양은 고려시대 대표적 철화청자 생산지였던 해남 진산리 요장과 비견할만하다. 또한 전세품이나 다른 가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녹산동 청자의 특징으로 금속기를 여럿 모방한 점, 도기와의 여러 유사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은 고려 중기 이후 전국 대부분 청자가마가 최고급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녹산동 가마는 경남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청자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n편년의 표식 유물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이 보이지 않고 통형잔·팽이형잔·매병 등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 기종과 형식이 소수 보이기 때문에 운영시기 하한은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으로 제작된 기종과 형식에서 용운리 10호 Ⅰ층 및 Ⅱ층 가형식, 삼흥리 D지구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 전기적 특징을 주로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요업의 시작은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PeriodicalId\":149053,\"journ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volume\":\"56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19-06-0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17792/KCS.2019.36..81\",\"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The Korean Cultural Studies","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17792/KCS.2019.36..81","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부산 녹산동에서 고려시대에 대단위 요업을 했던 가마터가 발굴조사되었다. 최초에 도기를 생산하다가 전환하여 청자를 제작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마를 이동하면서 상당기간 요업을 지속하였다. 총 5기의 가마와 그에 속한 폐기장이 조사되었다. 5만 점이 넘는 출토품을 통해 대량생산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지리적으로 낙동강과 남해안 수계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여 경남지역 일대에 청자를 공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품 분석 결과 요업 성쇠 및 운영시기에 따른 유물의 양식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지나 종류와 조형 면에서 비교적 다양하며, 장고·향완·잔탁·매병과 같은 위상 높은 기종이 다수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특히 대량의 철화청자를 생산하여 주목된다. 문양의 수준과 다양성은 떨어지나, 철화를 장식한 기물의 종류와 양은 고려시대 대표적 철화청자 생산지였던 해남 진산리 요장과 비견할만하다. 또한 전세품이나 다른 가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녹산동 청자의 특징으로 금속기를 여럿 모방한 점, 도기와의 여러 유사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은 고려 중기 이후 전국 대부분 청자가마가 최고급 청자 생산지였던 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녹산동 가마는 경남의 지역적 특색이 강한 청자를 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편년의 표식 유물인 한국식 해무리굽완이 보이지 않고 통형잔·팽이형잔·매병 등 고려 중기부터 나타나는 기종과 형식이 소수 보이기 때문에 운영시기 하한은 12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력으로 제작된 기종과 형식에서 용운리 10호 Ⅰ층 및 Ⅱ층 가형식, 삼흥리 D지구 출토품과 유사한 고려 전기적 특징을 주로 보이기 때문에, 적어도 요업의 시작은 11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