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Shifting Perceptions of Kim Goeng-pil in the 16th century : The Impact of Kyeonghyeon-Rok and Literary Elites","authors":"Hemi Choi","doi":"10.33253/gohan.2023.40.173","DOIUrl":null,"url":null,"abstract":"본 연구는 중종대와 선조대의 金宏弼(1454∼1504)에 대한 공적 평가의 변화를 景賢錄의 편찬 및 개찬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이로써 인물에 관한 특정 사실을 선별 하고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16세기의 사대부가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상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구명한 것이다. 중종대에 趙光祖(1482∼1519)를 중심으로 정력적으로 추진된 김굉필의 문묘 종사가 실패한 이후 선조 초엽에 이르러 그의 문묘 종사 청원이 다시 거론되었는데, 이때 실록 에 다시 등장한 김굉필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사이의 시기에 진행된 김굉필에 대한 선양 사업의 결과로서, 여기서 김굉필의 행적을 기록한 언행록인 경현록의 저술과 개찬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李楨(1512∼1571)은 경현록을 편찬한 뒤 李滉(1501∼1570)에게 자문을 요청 하였는데, 이황은 단순한 교정이 아니라 체제를 전반적으로 손보고 자신의 견해로 수정 하여 경현록을 새롭게 편찬하였다. 이 개찬 작업의 방점은 김굉필을 가문의 顯祖보다는 斯文의 宗匠으로서 보편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김굉필의 학문적 성취를 보다 강조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하여 김굉필이 도통에 포섭될 수 있는 기준을 사승 관계가 아닌 개인의 학문적 성취로 가져오고자 하였다. 김굉필에 대한 이황의 평가는 후대에 신뢰할 만한 전거로 인정받아 김굉필이 국가적 儒賢으로 공인되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김굉필은 이전의 권위 있는 인물 과 연결되지 않고서 도학적 성취를 인정받았으며, 국가의 학문 진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 폭넓게 수용되었다.","PeriodicalId":472276,"journal":{"name":"Go'jeon gwa haeseog","volume":"3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Go'jeon gwa haeseog","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33253/gohan.2023.40.173","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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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 연구는 중종대와 선조대의 金宏弼(1454∼1504)에 대한 공적 평가의 변화를 景賢錄의 편찬 및 개찬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이로써 인물에 관한 특정 사실을 선별 하고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16세기의 사대부가 자신의 학문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대상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구명한 것이다. 중종대에 趙光祖(1482∼1519)를 중심으로 정력적으로 추진된 김굉필의 문묘 종사가 실패한 이후 선조 초엽에 이르러 그의 문묘 종사 청원이 다시 거론되었는데, 이때 실록 에 다시 등장한 김굉필은 이전보다 훨씬 강화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사이의 시기에 진행된 김굉필에 대한 선양 사업의 결과로서, 여기서 김굉필의 행적을 기록한 언행록인 경현록의 저술과 개찬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李楨(1512∼1571)은 경현록을 편찬한 뒤 李滉(1501∼1570)에게 자문을 요청 하였는데, 이황은 단순한 교정이 아니라 체제를 전반적으로 손보고 자신의 견해로 수정 하여 경현록을 새롭게 편찬하였다. 이 개찬 작업의 방점은 김굉필을 가문의 顯祖보다는 斯文의 宗匠으로서 보편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김굉필의 학문적 성취를 보다 강조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하여 김굉필이 도통에 포섭될 수 있는 기준을 사승 관계가 아닌 개인의 학문적 성취로 가져오고자 하였다. 김굉필에 대한 이황의 평가는 후대에 신뢰할 만한 전거로 인정받아 김굉필이 국가적 儒賢으로 공인되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김굉필은 이전의 권위 있는 인물 과 연결되지 않고서 도학적 성취를 인정받았으며, 국가의 학문 진흥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 폭넓게 수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