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the Sericulture Education Institutes in the Seoul Area, 1900-1914","authors":"Jin-Seok Oh","doi":"10.17647/jss.2023.08.92.33","DOIUrl":null,"url":null,"abstract":"대한제국 전기 농상공부에서 만든 잠업과시험장은 양잠업 발달을 선도하는 인력 양성을 목표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을 모집하여 1904년까지 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일부 졸업생들은 잠업과 관료에 임명되어 양잠정책을 주도하였고, 일부는 전국 각지에 내려가 사립 시험장과 양잠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잠업과시험장은 일제의 압력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며 잠상시험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일시 살아남았지만 결국은 폐지되고 말았다.BR 잠상시험장을 폐지로 이끈 일제는 친일단체인 대한부인회를 내세워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용산양잠강습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강습소는 애초에 부녀자 교육을 목표로 했지만 여학생 모집이 어렵자 남학생까지 교육시키다가 1909년부터 여학생만을 입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계기로 권업모범장 역할 강화에 따라 강습소를 농상공부에 반환시켜 여자잠업강습소로 전환시키고 이를 권업모범장 용산지장에 부속시켰다. 용산지장 강습소는 전원 여학생만 교육했고, 졸업생들은 주로 잠업전습소, 치잠공동사육소의 일본인 기술자를 보조하는 인력이나 자가에서 양잠을 하며 일본식 양잠기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PeriodicalId":473306,"journal":{"name":"Seoulhag yeon'gu","volume":"41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23-08-31","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Seoulhag yeon'gu","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17647/jss.2023.08.92.33","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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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대한제국 전기 농상공부에서 만든 잠업과시험장은 양잠업 발달을 선도하는 인력 양성을 목표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을 모집하여 1904년까지 2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일부 졸업생들은 잠업과 관료에 임명되어 양잠정책을 주도하였고, 일부는 전국 각지에 내려가 사립 시험장과 양잠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잠업과시험장은 일제의 압력으로 크게 위축되었으며 잠상시험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일시 살아남았지만 결국은 폐지되고 말았다.BR 잠상시험장을 폐지로 이끈 일제는 친일단체인 대한부인회를 내세워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용산양잠강습소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강습소는 애초에 부녀자 교육을 목표로 했지만 여학생 모집이 어렵자 남학생까지 교육시키다가 1909년부터 여학생만을 입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일합방을 계기로 권업모범장 역할 강화에 따라 강습소를 농상공부에 반환시켜 여자잠업강습소로 전환시키고 이를 권업모범장 용산지장에 부속시켰다. 용산지장 강습소는 전원 여학생만 교육했고, 졸업생들은 주로 잠업전습소, 치잠공동사육소의 일본인 기술자를 보조하는 인력이나 자가에서 양잠을 하며 일본식 양잠기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