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Masaharu Anesaki’s Theory of ‘New Religion’ and its Practical Applications","authors":"Youn Seung Lee","doi":"10.36429/crrc.44.4","DOIUrl":null,"url":null,"abstract":"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 1873~1949)는 뛰어난 인도학자이며 불교학자이자, 일본 종교학의 창시자 혹은 확립자라고 평가된다. 본고에서는 그의 ‘신종교’ 이론과 그 실천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종교학의 한 측면을 조명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신종교와 ‘신종교’를 혼효하여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가 야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신종교와 ‘신종교’를 구분하여, 아네사키의 ‘신종교’에 관하여 탐구하였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신종교’란 당시 일본이 처했던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이상적인 종교이자, 과학적인 지식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였다. 이는 메이지 20년대에 나타난 종교계의 새로운 경향과 이념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로 지식층의 지지를 받았다.아네사키의 ‘신종교’ 이론은 〈메이지 30년사〉의 제7편인 <종교>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메이지 시대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종교’가 요구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네사키는 ‘일본의 종교사는 포괄과 융합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그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신종교’라고 하였다. 24~25세의 젊은 나이에 전개했던 그의 ‘신종교’론은 사실상 종교학자와 종교인으로서의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1896년에 개최된 종교가간담회는 메이지 20~30년대의 ‘신종교’ 운동의 정점을 이루었는데, 아네사키가 여기에 참석했던 일은 그의 학문적, 사회적 활동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이후, 정유윤리회(본래정유간화회로 출범), 1904년의 전시종교가간담회(戰時宗敎家懇談會), 1911년의 삼교회동(三敎會同) 등의 ‘신종교’ 활동에서 아네사키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6년의 종교가간담회로부터 1911년의 삼교회동에 이르기까지의 종교 간의 상호 협조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아네사키는 이러한 활동을 선도해왔던 것은 자신과 자신이 이끌던 문과대학 종교학과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네사키의 ‘신종교’ 이론과 그 실천이 그의 종교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작업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PeriodicalId":492156,"journal":{"name":"Jong'gyo munhwa bi'pyeong","volume":"32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Jong'gyo munhwa bi'pyeong","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36429/crrc.44.4","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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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아네사키 마사하루(姉崎正治, 1873~1949)는 뛰어난 인도학자이며 불교학자이자, 일본 종교학의 창시자 혹은 확립자라고 평가된다. 본고에서는 그의 ‘신종교’ 이론과 그 실천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종교학의 한 측면을 조명하였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신종교와 ‘신종교’를 혼효하여 사용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가 야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신종교와 ‘신종교’를 구분하여, 아네사키의 ‘신종교’에 관하여 탐구하였다. 이 글에서 말하는 ‘신종교’란 당시 일본이 처했던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이상적인 종교이자, 과학적인 지식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였다. 이는 메이지 20년대에 나타난 종교계의 새로운 경향과 이념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로 지식층의 지지를 받았다.아네사키의 ‘신종교’ 이론은 〈메이지 30년사〉의 제7편인 <종교>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메이지 시대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종교’가 요구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네사키는 ‘일본의 종교사는 포괄과 융합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그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신종교’라고 하였다. 24~25세의 젊은 나이에 전개했던 그의 ‘신종교’론은 사실상 종교학자와 종교인으로서의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1896년에 개최된 종교가간담회는 메이지 20~30년대의 ‘신종교’ 운동의 정점을 이루었는데, 아네사키가 여기에 참석했던 일은 그의 학문적, 사회적 활동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이후, 정유윤리회(본래정유간화회로 출범), 1904년의 전시종교가간담회(戰時宗敎家懇談會), 1911년의 삼교회동(三敎會同) 등의 ‘신종교’ 활동에서 아네사키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896년의 종교가간담회로부터 1911년의 삼교회동에 이르기까지의 종교 간의 상호 협조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아네사키는 이러한 활동을 선도해왔던 것은 자신과 자신이 이끌던 문과대학 종교학과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네사키의 ‘신종교’ 이론과 그 실천이 그의 종교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작업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