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A Study on materials related to Lee Uichang Venantius","authors":"Seok-won Lee","doi":"10.35135/casky.2023.23.37","DOIUrl":null,"url":null,"abstract":"이 글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알려진 이의창 관련 자료를 검토함으로 써 그의 이름과 가계, 세례명, 교회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이의창 관련 자료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황해 감영과 포도청 문초 기 록, 1839년 문초 기록, 1884년 시복 재판 증언 기록, 광주이씨 족보와 남 인 당파 족보[南譜] 등으로 분류된다. 포도청 문초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이의창(李宜昌)[이기양의 손자, 이방억의 아들]이 1839년에 체포되지 않았다가 1846년 김대건 신 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의창의 이름과 가계를 광주이씨 족보나 남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에 제작된 『광주이씨족보』에는 이의창이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금압 시기에 족보 제작자들이 가문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내용 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19세기 말에 제작된 남보 중에는 이의창(李宜敞)으로 나온다. 남인 명가의 계보를 종합·정리하려 했던 남보 편집자들은 ‘사학’인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표기하여 공동으로 천주교에 대응·배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의창의 형제와 후손들에 대해서는 남보 자료마다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랑(베라노) 또는 베난시오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베라노란 세례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베난시오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20세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김대건 신부 서한의 인용·번역문에 혼선과 오류가 있어서 복사의 세례명이 ‘베난시오’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성인전’에는 베라노 성인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 성인만 확인된다. 교회측 기록에는 ‘베라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의 세레명을 가진 신자는 여러 명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난시오’가 이의창의 세례명일 것으로 보인다. 이의창은 1845년 1월에 김대건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의주-변문까지 갔던 안내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고, 소공동[석정동]에 자리잡은 김대건 신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김 신부를 수행·보좌했다. 1846년 5~6월에 이의창은 김 신부를 수행하여 황해 탐사에 동참했는데 김 신부의 지시로 한문 서한을 작성했으며 중국 배로 건너가 전달하는데도 참여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후 행적은 찾을 수 없다.","PeriodicalId":476085,"journ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volume":"216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Gyohoe sahag (Suwon gyohoe'sa yeon'guso)","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35135/casky.2023.23.37","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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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글은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알려진 이의창 관련 자료를 검토함으로 써 그의 이름과 가계, 세례명, 교회 활동에 대해 정리했다. 이의창 관련 자료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과 황해 감영과 포도청 문초 기 록, 1839년 문초 기록, 1884년 시복 재판 증언 기록, 광주이씨 족보와 남 인 당파 족보[南譜] 등으로 분류된다. 포도청 문초에서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의 이의창(李宜昌)[이기양의 손자, 이방억의 아들]이 1839년에 체포되지 않았다가 1846년 김대건 신 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의창의 이름과 가계를 광주이씨 족보나 남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73년에 제작된 『광주이씨족보』에는 이의창이 나오지 않는다. 천주교 금압 시기에 족보 제작자들이 가문과 천주교와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내용 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19세기 말에 제작된 남보 중에는 이의창(李宜敞)으로 나온다. 남인 명가의 계보를 종합·정리하려 했던 남보 편집자들은 ‘사학’인 천주교와의 연관성을 표기하여 공동으로 천주교에 대응·배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의창의 형제와 후손들에 대해서는 남보 자료마다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랑(베라노) 또는 베난시오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베라노란 세례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베난시오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20세 초부터 현재까지 나온 김대건 신부 서한의 인용·번역문에 혼선과 오류가 있어서 복사의 세례명이 ‘베난시오’로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성인전’에는 베라노 성인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 성인만 확인된다. 교회측 기록에는 ‘베라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자가 나오지 않고, 베난시오의 세레명을 가진 신자는 여러 명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베난시오’가 이의창의 세례명일 것으로 보인다. 이의창은 1845년 1월에 김대건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의주-변문까지 갔던 안내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고, 소공동[석정동]에 자리잡은 김대건 신부의 집주인이자 복사로서 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김 신부를 수행·보좌했다. 1846년 5~6월에 이의창은 김 신부를 수행하여 황해 탐사에 동참했는데 김 신부의 지시로 한문 서한을 작성했으며 중국 배로 건너가 전달하는데도 참여했다. 김 신부 일행이 체포되기 전에 배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갔는데, 이후 행적은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