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The Study of Misailrok Written by Lee Beom-jin, the Chosun Minister to the US in 1896","authors":"Hyo-Jeong Lee","doi":"10.18399/actako.2023..92.003","DOIUrl":null,"url":null,"abstract":"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지만, 일본과 러시아 등 주변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자의든 타의든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896년 6월 주차미국특명공사로 명받아 미국에 머물면서 『미사일록』이란 사행록을 남겼다. 『미사일록』은 1896년 6월 20일부터 1897년 1월 31일까지의 활동이 기록되었는데, 작성 기간이 재임 초기의 약 8개월뿐이기 때문에 전체 재임 기간 중 일부만을 알 수 있지만, 이범진의 미국 견문 내용, 외교 활동, 사상 등을 비교적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유의미하다. 이범진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이른바 근대적 만국공법의 시스템 속에서 파견된 인사였지만, 그의 저작인 『미사일록』은 조선시대 사행록의 전통 속에서 서술되었다. 개인의 사적 일기라기보다는 공식 보고서에 가까우며, 따라서 공사 혼자만의 기록이 아닌 일행들과 함께 공동으로 저작되고 소유되는 특징을 보인다.BR 이범진의 미국 견문은 결국 새로운 제국, 미국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방문했던 워싱턴 기념탑, 국회의사당, 박물관 등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당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였다. 이범진은 그 안에서 조선이 살아나갈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이미 근대의 환경에 익숙한 듯이 미국의 제도나 풍습, 여성 등 대부분의 견문에서 긍정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약소국인 조선이 제국들의 질서 속에서 소위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는 못하였다.","PeriodicalId":479824,"journal":{"name":"Han'gughag nonjib","volume":"98 1","pages":"0"},"PeriodicalIF":0.0000,"publicationDate":"2023-09-30","publicationTypes":"Journal Article","fieldsOfStudy":null,"isOpenAccess":false,"openAccessPdf":"","citationCount":"0","resultStr":null,"platform":"Semanticscholar","paperid":null,"PeriodicalName":"Han'gughag nonjib","FirstCategoryId":"1085","ListUrlMain":"https://doi.org/10.18399/actako.2023..92.003","RegionNum":0,"RegionCategory":null,"ArticlePicture":[],"TitleCN":null,"AbstractTextCN":null,"PMCID":null,"EPubDate":"","PubModel":"","JCR":"","JCRName":"","Score":null,"Tota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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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지만, 일본과 러시아 등 주변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아 자의든 타의든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896년 6월 주차미국특명공사로 명받아 미국에 머물면서 『미사일록』이란 사행록을 남겼다. 『미사일록』은 1896년 6월 20일부터 1897년 1월 31일까지의 활동이 기록되었는데, 작성 기간이 재임 초기의 약 8개월뿐이기 때문에 전체 재임 기간 중 일부만을 알 수 있지만, 이범진의 미국 견문 내용, 외교 활동, 사상 등을 비교적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유의미하다. 이범진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이른바 근대적 만국공법의 시스템 속에서 파견된 인사였지만, 그의 저작인 『미사일록』은 조선시대 사행록의 전통 속에서 서술되었다. 개인의 사적 일기라기보다는 공식 보고서에 가까우며, 따라서 공사 혼자만의 기록이 아닌 일행들과 함께 공동으로 저작되고 소유되는 특징을 보인다.BR 이범진의 미국 견문은 결국 새로운 제국, 미국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방문했던 워싱턴 기념탑, 국회의사당, 박물관 등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당대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였다. 이범진은 그 안에서 조선이 살아나갈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이미 근대의 환경에 익숙한 듯이 미국의 제도나 풍습, 여성 등 대부분의 견문에서 긍정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약소국인 조선이 제국들의 질서 속에서 소위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