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ckround and Purpose about the Construction of Nine-story Wooden Pagoda(九層木塔) at Hwangnyongsa Temple(皇龍寺)

Mi Seon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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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皇龍寺는 新羅眞興王14년(553) 창건되었고, 이후 丈六尊像및 金堂과 九層木塔이 추가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가운데 善德女王14년(645)에 건립된 황룡사 구층목탑은 慈藏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자장은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으로 여왕의 권위를 높이고 국내 여론을 결집시키고자 의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앞선 시대의 安弘이 최초로 언급한 내용이었다. 안홍이 유학했던 隋는 통일왕조를 수립하면서 전국에 佛塔을 세워 황제의 업적을 선전하였다. 이를 체험한 안홍은 신라에 佛舍利를 입수해 와 황룡사 구층목탑에 안치함으로써 선덕여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현재 학계는 『동도성립기』의 사료적 가치와 안홍의 생애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神行禪師碑』에 신행선사와 안홍의 혈연관계가 분명히 보이므로, 안홍이 7세기에 생존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眞平王代후반 왕권은 안정되어 있었고, 선덕여왕의 즉위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불교계에서는 圓光이 황룡사에 주석하며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반면 안홍은 역사적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지 않을 만큼 위상에 한계를 보였던 것 같다. 따라서 안홍의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주장도 631년에는 주목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자장은 638년 唐에 유학하기 전부터 안홍의 사상을 잘 알고 있었고, 당에서는 文殊菩薩을 직접 만나 眞身舍利등을 얻게 되었다. 643년 신라로 귀국한 자장은 이것을 배경으로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을 추진하였고, 국내외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여론 결집을 이끌어냈다.
黄龙寺建九层木塔的背景与目的
皇龙寺成立于新罗真兴王14年(553),之后又增设了远六尊像、金堂和九佛木塔。其中,善德女王14年(645)建立的黄龙寺九层木塔是在慈藏的建议下建造的。子藏被认为是想通过建立黄龙寺九层木塔来提高女王的权威,聚集国内舆论。但是这样的主张是前一个时代的安弘最先提到的内容。安红儒学的隋代建立统一王朝,在全国立佛塔,宣传皇帝业绩。体验到这一点的安红从新罗得到了佛手舍利,安置在黄龙寺九层木塔上,想要提高善德女王的权威。现在学界对《东道建立记》的史料价值和安红的生平议论纷纷。但是在《神行禅寺大殿》中,神行禅师和安红的血缘关系非常明显,可见安红是生存在7世纪的人物。在真平王朝后期,王权非常稳定,支持善德女王即位的政治势力主导着政局。另外,在佛教界,滚石对黄龙寺进行了注释,发挥了政治社会的影响力。相反,安红的地位似乎受到了限制,没有留下明确的历史记录。因此,安红建立黄龙寺九层木塔的主张在631年也不受关注。但是子藏在638年唐朝留学之前就很了解安红的思想,在唐朝直接遇到了“文门菩萨”,得到了“真身天国”等。子藏于643年回到新罗,以此为背景推进了黄龙寺九层木塔的建设,并吸引了能够应对国内外危机状况的舆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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